일상글

시간 이전의 삶

가치지기 2025. 5. 12.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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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리듬과 함께했던 인간의 기억'

- 시간의 주인이 아닌 종이 되어버린 우리에게

"신들이여, 시간을 구분하는 법을 처음 발견한 사람을 꾸짖어 주소서! 또 여기에 해 시계를 세운 사람도 꾸짖어 주소서. 나의 하루를 이렇게 야비하게 나누고 잘라 작은 마디로 끊어 놓다니."

– 티투스 마치우스 플라우투스

고대 로마의 희극작가 플라우투스는 이처럼 강한 어조로 시간의 분할을 비판하였습니다. 그는 인위적으로 쪼개진 시간 속에서 인간의 자유가 사라졌다고 느꼈던 듯합니다. 특히 해 시계처럼 시간을 ‘보이게’ 만든 도구는, 사람들로 하여금 시간에 얽매이고 통제당하게 만든 것으로 여긴 것이지요.

플라우투스의 말은 단순한 불평이라기보다는, 인류가 자연의 흐름을 벗어나 인위적인 시간 체계에 자신을 억지로 맞추게 된 것에 대한 경고처럼 들립니다.

이 말에 귀 기울이면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오르게 됩니다. "과연 인간은 처음부터 시간의 통제 속에 있었던 존재였을까?"

인간은 태초부터 해와 달, 그리고 계절의 순환 속에서 자연이 빚어낸 시간의 흐름을 온몸으로 느끼며 살아왔습니다.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는 숫자로 계산되는 시간이 아니라, 밝음과 어둠의 흐름에 따라 몸으로 반응하며 일상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들의 시간은 경계가 없었습니다.

햇살의 농도와 길이를 느끼며 새벽녘 촉촉한 안갯속에서 조용히 눈을 떴고, 해가 지면 자연스럽게 하품을 하며 잠에 들었을 것입니다.

그 시간은 흘러가되 쫓지 않았고, 존재하되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바람처럼 자유롭고 조화로웠습니다.

하지만 에덴에서 쫓겨난 이후, 인간은 생명이 유한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수명이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은 시간에 대한 새로운 강박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인간은 시간의 주인이 아니라, 시간의 종이 되어버렸습니다.

시간을 측정하고 쪼개고 통제하고자 하는 욕망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시간을 나눈 것은 곧 욕망의 도구였습니다.

시계를 만들고, 달력을 만들고, 하루를 분과 초 단위로 계획하기 시작한 것은 '더 많이', '더 빠르게', '더 앞서'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이 욕망은 우리를 끊임없이 다그치고, 쉼 없이 달리게 만들었습니다.

아이들조차 시계를 보고 일어나고,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고, 몇 시까지 놀아야 하는지를 배웁니다.

어른이 되면 시간은 더욱 촘촘한 그물망이 되어 우리를 옥죄기 시작합니다.

시간을 나눈 것은 결국 삶을 나눈 것이며, 존재의 흐름을 잘게 끊어 놓은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본래 그렇게 살아가도록 설계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시간을 쪼개어 쓰라고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해는 그저 뜨고, 달은 그저 지날 뿐입니다.

나무는 시계를 보지 않고 자라고, 꽃은 시간표를 만들지 않고 피어납니다.

자연의 동물들은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잡니다. 배가 고프지 않아도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억지로 먹는 존재는 인간뿐입니다.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단순히 시계를 무시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삶을 더 깊이 느끼고,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내기 위한 지혜의 회복입니다.

시계를 바라보는 대신 창밖의 구름을 바라보고,

취침 시간을 따르기보다 몸의 피곤함에 귀를 기울이며, ‘하루’라는 개념보다 ‘지금’이라는 감각에 집중해 보는 것입니다.

효율이 아닌 충만함을 추구하는 삶,

통제가 아닌 조화 속에 머무는 삶,

그렇게 살아간다면 시간이라는 인위적 그물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인간은 시계 없이도 살아갈 수 있지만, 삶의 흐름을 잃으면 존재의 의미마저 희미해집니다.

지혜로운 삶이란, 시간을 다루는 기술이 아니라,

시간을 받아들이는 감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여전히 살아 있는 자연의 리듬에 귀 기울일 때, 우리는 시간과 함께 흐르고, 그 흐름 안에서 진정한 평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자연의 리듬에 귀 기울이며, 행복한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By가치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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